도시계획가 아카이브 · 08
도메니코 폰타나 — 오벨리스크로 로마 전체를 재편한 축선의 설계자
18~19세기 · 근대 도시계획의 태동 직전 | 1543~1607
◀ 이전 07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 · 다음 09 안드레아 팔라디오 ▶
CONCEPT
1. 개념 — 이 인물이 남긴 것
도메니코 폰타나는 교황 식스토 5세의 재위 기간(1585~1590년) 동안 로마 도시 전체를 곧은 축선으로 재편한 건축가·엔지니어입니다. 그는 로마 시내에 흩어져 있던 주요 순례 성당들 — 성 베드로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산타 마리아 마조레, 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메 등 — 을 직선 대로로 연결하고, 그 대로의 끝점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세워 시각적 종착점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필라레테나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처럼 백지 위에 새로운 이상도시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이미 수백 년간 무질서하게 형성된 기존 도시 로마 위에 '축선'이라는 조직 원리를 덧씌워 도시 전체를 재편했다는 점에서 도시계획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LIFE & TIMES
2. 역사 — 인물과 시대
도메니코 폰타나는 1543년 스위스 접경 지역인 티치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로마로 이주해 건축을 배웠습니다. 추기경 펠리체 페레티 — 훗날 교황 식스토 5세가 되는 인물 — 의 눈에 띄어 그의 개인 건축가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 인연이 이후 그의 경력을 결정짓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 1543스위스 접경 티치노 출생, 이후 로마로 이주
- 1570년대추기경 펠리체 페레티(훗날 식스토 5세)의 개인 건축가로 활동
- 1585펠리체 페레티, 교황 식스토 5세로 즉위 — 폰타나를 교황청 수석 건축가로 임명
- 1586바티칸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 광장으로 이전 — 당대 최대 규모의 토목공학 프로젝트
- 1585~1590로마 주요 성당을 잇는 직선 대로망 건설, 아쿠아 펠리체 수도교 완공
- 1590식스토 5세 선종. 이후 뇌물 스캔들에 연루되어 로마에서 실각
- 1592나폴리로 이주, 나폴리 왕궁 등 설계
- 1607나폴리에서 사망
폰타나의 로마 시절 업적은 사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어 연도까지 명확히 확인되는 편이지만, 나폴리 이주 이후의 세부 행적은 로마 시절만큼 상세히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CONTEXT
3. 배경 — 왜 등장했나
16세기 후반 로마는 종교개혁에 대응하는 반종교개혁(가톨릭 종교개혁)의 중심지였습니다. 교황청은 전 유럽에서 몰려드는 순례자들에게 로마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의 심장부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도시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순례 동선으로 재구성하려는 정치적·종교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로마가 고대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천 년 넘게 무계획적으로 성장한 도시였다는 점입니다. 주요 성당들은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순례자들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헤매며 성당 사이를 오가야 했습니다. 교황 식스토 5세는 즉위 직후 이 문제를 해결할 대규모 도시 정비를 지시했고, 폰타나가 그 실행을 맡았습니다.
오벨리스크를 대로 끝에 세운다는 발상은 단순한 미학적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좁은 골목이 뒤엉킨 로마에서 순례자가 멀리서도 다음 목적지 성당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시각적 이정표가 필요했고, 이집트에서 가져와 방치되어 있던 고대 오벨리스크들이 바로 그 역할에 활용된 것입니다.
THE THEORY
4. 핵심내용 — 이론의 구체적 내용
가. 성당을 잇는 직선 대로망
폰타나가 실행한 계획의 핵심은 로마 시내 주요 성당들을 최단 직선으로 연결하는 대로를 새로 뚫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구불구불한 골목망 위에 곧은 축선을 겹쳐 놓음으로써, 순례자는 한 성당에서 다음 성당까지 최단 경로로 곧장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대로들은 서로 다른 각도로 뻗어나가 도시 전역에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했습니다.
기존의 불규칙한 골목망 위에, 주요 성당을 잇는 곧은 직선 대로가 새로 놓인 모습을 표현한 개념 재구성 이미지입니다. 실제 로마 지도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닌 원리 이해용 단순화 지도입니다.
나. 오벨리스크 — 시선을 조직하는 도시의 이정표
폰타나는 대로 하나하나의 끝점에 고대 오벨리스크를 세워, 멀리서도 눈에 띄는 수직 랜드마크로 삼았습니다. 순례자는 대로 초입에서도 저 멀리 우뚝 선 오벨리스크를 보고 목적지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도시계획에서 '시선축(비스타, vista)'이라는 개념을 실제 도시 스케일에 적용한 초기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1586년 바티칸 오벨리스크 이전입니다. 높이 25미터, 무게 약 330톤에 달하는 이 오벨리스크를 기존 위치에서 성 베드로 광장 중앙으로 옮기는 작업은 900명의 인부와 140마리의 말이 동원된, 당대 유럽 최대 규모의 토목 공학 프로젝트였습니다. 폰타나는 거대한 목조 비계와 도르래· 윈치 체계를 설계해 이 작업을 성공시켰고, 이 성과로 교황청 수석 건축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1586년 바티칸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 광장으로 옮기던 공사 현장을 재구성한 개념도입니다. 실제 인물을 특정하지 않은 익명의 작업 장면이며, 실측 기록화가 아닌 원리 이해용 이미지입니다.
다. 대로에서 바라본 풍경 — 걷는 사람의 시점
폰타나의 계획이 특별한 이유는 지도 위의 추상적 선이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설계되었다는 점입니다. 새로 뚫린 대로를 따라 걸으면, 좌우로 늘어선 건물들 사이로 저 멀리 오벨리스크가 한 점의 소실점처럼 시야 중앙에 고정되어 보입니다. 이런 '한 점으로 수렴하는 가로 풍경'은 이후 바로크 도시계획의 대표적인 시각 문법이 됩니다.
곧게 뻗은 대로를 걷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대로 끝 오벨리스크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수렴하는 모습을 표현한 개념도입니다. 특정 실존 거리의 실측 풍경이 아닌, 시선축 원리 이해용 재구성 이미지입니다.
CASES
5. 대표사례 — 실제 적용된 프로젝트·도시
폰타나가 실행한 로마 축선 계획은 성 베드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산타 크로체 인 제루살렘메, 포폴로 광장 등을 직선 대로로 연결하며 오늘날까지도 로마 구시가지의 기본 골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 시민의 물 공급을 위한 아쿠아 펠리체 수도교를 완공해, 축선 계획과 기반시설 정비를 함께 진행했습니다.
로마에서 실각한 이후 나폴리로 이주한 폰타나는 나폴리 왕궁 설계에도 참여하며, 이탈리아 남부에도 자신의 건축·도시계획 경험을 이어갔습니다.
대상 — 신축 요새도시, 방어를 위한 형태 설계
스케일 — 성벽 단위의 군사 공학적 개입
대상 — 기존 대도시 로마, 종교적 순례 동선 재편
스케일 — 도시 전체 단위의 축선·시선 조직
KEY POINTS
6. 키포인트 — 시험·실무 핵심 요약
EXAM & PRACTICE FOCUS
- 교황 식스토 5세(재위 1585~1590)의 로마 도시 정비 사업을 실행한 수석 건축가
- 로마 주요 성당(성 베드로·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산타 마리아 마조레 등)을 잇는 직선 대로망 건설
- 대로 끝점에 오벨리스크를 세워 시각적 이정표(비스타)로 활용 — 도시 스케일의 시선축 조직
- 1586년 바티칸 오벨리스크 이전 — 900명 인부·140마리 말 동원, 당대 최대 규모 토목 공학 프로젝트
- 기존 무질서한 도시(로마) 위에 축선을 덧씌운 '기성 시가지 재편형' 계획 — 백지 위 이상도시론(필라레테 등)과 대비
- 아쿠아 펠리체 수도교 완공 — 축선 계획과 기반시설 정비를 함께 추진
- 대로 끝 랜드마크로 수렴하는 시각 문법은 이후 바로크 도시계획의 표준이 됨
LEGACY
7. 이후영향 — 후대 계보
폰타나가 로마에 적용한 '직선 대로 + 랜드마크 시선축'이라는 문법은 이후 유럽 여러 도시의 바로크 도시계획에 폭넓게 계승됩니다. 17~18세기 여러 궁정 도시들이 광장과 대로 끝에 오벨리스크· 분수·기념비를 세워 시선을 조직하는 방식은 폰타나의 로마 계획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더 나아가 19세기 조르주 외젠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 사업 역시, 기존 대도시 위에 곧은 대로를 뚫어 주요 기념물·광장을 시각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폰타나가 로마에서 시도한 접근의 계보를 잇는 사례로 흔히 언급됩니다.
CRITIQUE
8. 한계와 평가
폰타나의 로마 계획은 기존 시가지를 관통하는 직선 대로를 뚫는 과정에서 다수의 기존 건물과 골목이 철거되었고, 이는 당시 거주민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주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후 오스만의 파리 대개조와 마찬가지로, 통치자의 정치적· 상징적 목적을 위해 기존 도시 조직이 급격히 재편되는 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합니다.
또한 대로망이 순례 동선과 종교적 상징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일반 시민의 일상적 생활 동선이나 상업 기능과의 연계는 상대적으로 덜 고려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형성된 대도시 위에 '축선'이라는 조직 원리를 성공적으로 덧씌워 도시 전체의 인지 구조를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도시계획사에서 신도시 설계자와는 다른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CLOSING
9. 맺음말 — 왜 알아야 할까
도메니코 폰타나는 백지 위에 새 도시를 그리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복잡한 대도시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인물입니다. 그의 오벨리스크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방향 감각을 재편하는 시각적 장치였습니다.
곧게 뻗은 대로 끝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는, 걷는 사람이 도시 어디에 있든 자신의 위치와 다음 목적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로마식 나침반이었습니다.
다음 편은 건축과 도시공간의 관계를 체계화한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 안드레아 팔라디오로 이어가겠습니다.
'도시계획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도시계획가 -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 (0) | 2026.08.28 |
|---|---|
| 도시계획가 - 필라레테 (0) | 2026.08.27 |
| 도시계획가 - 알베르티 (0) | 2026.08.26 |
| 도시계획가 - 비트루비우스 (0) | 2026.08.25 |
| 도시계획가 - 디노크라테스 (0) | 2026.08.24 |